물랭 루주의 작은 거인, 툴루즈 로트레크의 대표 작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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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의 카페나 술집은 모두 19세기 말에 등 따습고 배부르던 ‘벨 에포크 시대 Belle Époque’의 산물입니다. 비로소 먹고살기 좋아지던 시절 덕분에, 물랭루주 같은 야한 술집들이 파리에 연거푸 생겼고요, 덕분에 파리의 인상파 그림들도 대중적으로 팔려 나가기도 했으니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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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리 드 툴루즈 로트레크의 대부분의 그림들이 바로 그 말랑말랑한 좋은 시절, ‘벨 에포크 Belle Époque’ 시대를 배경으로 생산된 작품인 것이 그 때문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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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툴루즈 로트레크 서울 전시회 ​툴루즈 로트레크 전 ‘물랭 루주의 작은 거인’ 서울 단독 전시회가 예술의 전당 한가람 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다. 월드투어 14번째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말라는 캐치프라이스도 보인다. 아무리 보아도 그래 대단한 전시회가 아닌 것인, 로트레크의 연필그림 드로잉, 판화 포스터와 스케치 들인데, 프린트 물이라 아트숍 어디에서건 쉽게 살 수 소품 작품들이다. 말하자면 스필버그의 죠스 Jaws를 광고해놓고 막상 가보니 기록 영화 ‘상어이빨’을 돌리고 격이 되었다 (내가 영화관 운영할 때 그 짓 많이 했다) ​​한가람 미술관은 이 인쇄물 전시에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제1,2전시실을 통째로 무려 6개월 ( 2020년 5월 3일까지 )이 넘게 대관해주었다. 세상에 날라리 전시는 없는 것이지만 미술 작품이란 하나뿐인 작품의 오리지널리티 때문이다. 도대체 누가 이 전시를 기획했나 보니 주최는 ‘현대씨스퀘어’다, 솔직히 입장료금 1만 5천 원 너무 아깝다. ​​전시회가 개최되고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레크의 작품을 잘 소개해야겠다는 생각이 지난 연말부터 들었다. 어느 정도 이 화가의 작품을 어느 정도 전체적인 균형 속에서 이해하고 전시회를 가든지 말든지 해야 할 것 같아서였다. 오늘 소개하는 작품들은 이번 전시회에 몇 장의 포스터를 빼고는 않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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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무렵 유럽에는 로트레크의 친구이며 게이의 옹호자였던 아일랜드계 영국 극작가 오스카 와일드 Oscar Wilde의 동성애 재판이 진행되고 있던 무렵입니다. 로트레크는 이 시절 여성들의 동성애를 담은 그림을 11점이나 제작해서 그중 다섯 점은 ‘르 피가로 Le Figaro’의 ‘파리의 쾌락’ 기사에 삽화로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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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신 병원에 입원 중에도 그랬지만 로트레크는 어린 시절부터 말들의 모습을 중심으로 크레용과 목탄으로 자주 즐겨 그렸습니다. 말들과 관련한 서커스 연작도 남아있는 것만도 36 작품이거든요, 그러나 슬프죠, 그가 걷거나 뛰거나 달리지 못하던 시절부터 유난히 ‘달리는 말’들의 멋진 모습의 드로잉들을 자주 그렸거든요. 여러 장 그린 마상 경기의 그림들은 모두가 우아한 네발로 달리거나 뛰거나 재주를 피우는 그림들이었으니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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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달리고 싶었을까?​거친 땅을 달리는 홍갑 기병대의 ‘달리는 말’, 숨 가쁜 흥분과 능력, 그리고 근육 기억으로 가득 찬 말들의 모습 속에서 자신의 이율배반의 파괴를 꿈꾸었다면, 참 슬픈 그림입니다. ‘달리는 말’들의 그림들을 색칠하던 그 모티브에 깊은 연민이 느껴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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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로트레크는 댄스 무도장에서 다리를 번쩍 들며 캉캉 춤을 추던 무희들과 스페인 플라멩코를 추던 댄서들을 바라보면서, 혹은 그녀들 그림을 그리면서도, 역시 그에게는 마찬가지의 슬픔이 있었을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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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려라, 로트레크 우리가 응원할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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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의 나이 28살이던 1892년에 파리에서 찍은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레크 Henri de Toulouse-Lautrec의 초상 사진, 이 사진은 그의 친구 빈센트 반 고흐의 암스테르담 미술관 Van Gogh Museum, Amsterdam에 소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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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cm의 키로 세상을 살다간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레크 Henri de Toulouse-Lautrec는 1864년 11월 24일, 알비 Albi에서 태어나 36세가 되던 1901년 9월 9일, 파리에서 죽고 셍-엉드헤-듀-부와 Saint-André-du-Bois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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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적인 포스터 디자이너이며 파리 사교계의 밤의 백작이었던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레크 Henri de Toulouse-Lautrec의 작품들은 파리의 등 따습고 배부르던 ‘벨에포크 시절 Belle Epoque Paris’의 유리 온상에서 밤의 꽃들을 활짝 피웠습니다. 그는 19세기 파리를 이해하는 도시 생활 깊숙이의 모습을 골목골목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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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생전 신체적 결함과 환락가에서 생활 등이 그의 미술 활동에 비난과 조롱거리가 되어 많은 괴로움을 당하였지만, 그의 많은 작품은 그 후로 몇십 년 동안의 후세 미술가들에게 새로운 용기와 전범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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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회화와 드로잉, 조각 중심이던 고급 미술을 담벼락 중심의 포스터나 로고 심지어는 비주얼 문화의 첫 지평을 연 아티스트입니다. 그가 고급 미술과 대중미술을 접합시킨 특별한 중간 문화의 접합 시도 작업들은 훗날 알폰스 무하 Alphonse Mucha에서 앤디 워홀 Andy Warhol에게까지 옮겨붙어 새롭게 꽃피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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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족의 신분으로 그림을 그린다는 아들의 꿈을 결코 받아들이지 않았던 아버지는 끝내 그를 용납하지 않았다. 그가 죽은 후 아버지에게는 그의 인생에 최대 실패작이라 여겼던 로트레크의 미술이란 ‘조잡했던 스케치’들에 불과했고 처리하기 거추장스러운 것들이어서 아내에게 빨리 치우라고 했다. 그의 어머니에게 화실에 남겨진 모든 작품을 통째로 전부 챙겨 깡그리 고향인 알비 시에 기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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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죽은 후 20년이 지나서 1922년 고향 알비 시내 베르비 궁전 Le Palais de la Berbie에는 툴루즈 로트레크 미술관 Le Musée Toulouse – Lautrec, Albi이 개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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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올렸던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레크의 미술’을 재구성한 글입니다.​​​Henri de Toulouse-Lautrec저스틴 김의 미술 ​​​